미국 문학의 거장, 존 스타인벡의 성장 서사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인간 존재의 비극성과 사회적 현실을 탁월하게 그려낸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그의 단편집 『긴 골짜기』(The Long Valley)』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데, 그중 단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 바로 「도주」(Flight) 입니다.
이 작품은 한 소년의 도피와 죽음을 통해 인간의 숙명, 성숙, 그리고 폭력의 본질을 정면으로 직시합니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주는 이 짧은 소설은, 단순한 성장담을 넘어 삶과 죽음의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어머니의 부탁, 그리고 피의 숙명
캘리포니아 해안의 외딴 농장에서 세 자녀를 키우는 마마 토레스. 그녀의 19살 아들 페페 토레즈(Pepé Torres)는 멕시코계 미국인이자 아직 미성숙하고 게으른 소년이며 이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 어머니와 남매들과 함께 농장에서 살아가는 페피는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철없는 소년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그에게 가족을 대표해 도시 몬트레이로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몬트레이에 간 페페는 술에 취해 사소한 말다툼 끝에, 한 남자를 아버지의 칼로 찔러 죽이고 맙니다. 곧 현상 수배된 도망자가 됩니다. 집으로 돌아온 페페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급히 산으로 도망칩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기도와 함께 “산에서 검은 감시자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합니다.
이후 그는 가족이 마련해준 말을 타고 산으로 도망치지만, 길은 험난하고 고통스럽습니다. 페페는 도망치는 과정에서 점점 인간성을 잃어갑니다. 음식과 물이 떨어지고, 총알은 하나씩 줄어들며, 몸은 부상으로 쇠약해져갑니다. 결국 추격자들이 가까워오고, 페피는 결국 산에서 추격자들의 총에 맞아 바위 사이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도주」는 겉으로는 단순한 추격극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주제 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1. 성장과 책임의 통과의례
「도주」의 중심에는 페페의 성장, 즉 소년에서 ‘남자’로의 변신이 있습니다. 페페는 처음엔 책임을 회피하는 미성숙한 소년이지만,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점점 인간성을 벗고 동물적 본능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는 도망을 멈추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인간다운 존엄성을 되찾습니다. 이는 고통과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성숙임을 시사합니다.
2. 폭력의 악순환
페피가 휘두른 칼은 우발적이었지만, 결과는 치명적이었고 그는 사회적 규범에 따라 ‘죽어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스타인벡은 이를 통해 폭력이 폭력을 낳고, 인간은 쉽게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3. 자연과 인간의 관계
페피는 산을 오르며 점점 자연과 융화되어가고, 끝내는 바위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 장면은 인간 존재가 결국 자연의 일부로 흡수된다는 회귀적 이미지로 읽히며, 존재의 무상함과 운명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스타인벡은 자연의 거칠고 냉혹한 환경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본성을 드러내는지 보여줍니다. 페페는 문명(가정)에서 자연(산)으로, 인간에서 동물로, 다시 인간으로 변화합니다. 이 과정은 사회가 요구하는 ‘남자다움’과 개인의 정체성, 그리고 본능 사이의 갈등을 상징합니다.
4. 사회적 기대와 개인의 비극
작품은 사회가 규정한 남성성과 책임의 기준이 때로는 개인에게 비극을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페페가 ‘남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그의 목숨이었습니다. 이는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게 합니다.
현대 독자에게 주는 의미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사회적 성인’이 되라는 압박 속에 놓여 있습니다. 페피처럼 갑작스럽게 책임을 떠안게 되는 청년들, 경쟁과 규범 속에서 자신을 잃고 도피하고 싶은 순간들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주」는 한 소년의 비극이자, 동시에 보편적 성장의 메타포로 다가옵니다.
또한, 이민자 배경의 주인공을 통해 사회적 소외, 차별, 편견 등의 이슈도 함께 비춰보게 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들이며, 스타인벡의 통찰이 시대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오늘날에도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수많은 선택과 책임을 마주합니다. 「도주」는 성숙이란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고통과 책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임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성공’, ‘성인’, ‘남성다움’과 같은 규범이 존재합니다. 이 작품은 그러한 기준이 정말 옳은지, 그리고 그 기준이 개인에게 어떤 부담을 주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는 메시지는, 현대의 경쟁적이고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작품 속 명대사
“A man can be a coward and live for sixty years, and a man can be brave and die in an hour.”
“사람은 겁쟁이로 60년을 살 수도 있고, 용감하게 행동해서 한 시간 만에 죽을 수도 있어.”
“When thou comest to the high mountains, if thou seest any of the dark watching men, go not near to them nor try to speak to them.”
“네가 높은 산에 오르면, 만약 어둠 속에서 너를 지켜보는 이들을 본다면,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도 말고 말을 걸지도 마라.”
“His face was stern, relentless and manly.”
“그의 얼굴은 엄격하고, 집요하며, 남자다웠다.”
“He stood up straight and tall on the rock, silhouetted against the sky.”
“그는 바위 위에서 곧게, 우뚝 서서 하늘을 배경으로 실루엣이 되었다.”
이 대사들은 인간의 용기와 운명에 대한 스타인벡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드러냅니다. 페피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결단에 대한 서사입니다.
짧지만 강렬한, 인간 본성에 대한 서사시
존 스타인벡의 「도주」는 짧은 분량 안에 폭력, 성숙, 자연, 운명이라는 주제를 강렬하게 담아낸 걸작입니다. 그가 펼쳐낸 단어 하나하나는 인간 존재의 뿌리 깊은 진실을 파고들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도망치는 중입니까, 아니면 성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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